크레용으로 그린 열두 개의 작은 꿈 — Crayon World
어린 시절의 그림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었습니다.
하늘이 분홍색이어도 괜찮았고, 집보다 나무가 더 커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크레용이 종이 밖으로 조금 삐져나가거나 서로 다른 색이 겹쳐져도, 그 안에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Crayon World는 그런 어린 시절의 감각에서 시작된 앨범입니다.
무언가를 정확하게 표현하기보다 마음속에 떠오른 장면을 그대로 그려보던 시간. 작은 사물 하나만으로도 새로운 놀이가 시작되고, 평범한 방 안이 숲이나 바다, 때로는 먼 우주가 되던 순간을 음악으로 옮겨보고 싶었습니다.
이 앨범에는 열두 개의 작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각 곡은 하나의 긴 이야기로 이어지기보다, 아이가 잠시 꾸었다가 다음 장면으로 건너가는 짧은 꿈처럼 구성했습니다. 어떤 곡은 햇빛이 들어오는 방에서 시작되고, 어떤 곡은 장난감과 함께 떠나는 작은 모험이 되며, 또 다른 곡은 하루가 저물 무렵의 포근한 상상으로 이어집니다.
음악에는 리코더와 피아노, 실로폰,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처럼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악기들을 중심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악기들은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지만, 몇 개의 음만으로도 오래된 기억을 불러옵니다. 처음 악기를 배웠던 교실, 서툴게 맞춰보던 합주, 작은 발표회를 기다리던 마음처럼 지금은 희미해진 장면들이 단순한 소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악기의 종류만 바꾼다고 해서 제가 원했던 어린 시절의 질감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AI가 생성한 연주는 너무 정확하고 매끄러웠습니다. 악기 소리는 깨끗했고 연주는 능숙했지만, 오히려 전문 연주자들이 어린이 음악을 세련되게 연주한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완성도가 Crayon World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동심과 서투름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처음 악기를 손에 들었을 때는 음정과 박자가 언제나 정확하지 않습니다. 리코더의 음이 살짝 흔들리기도 하고, 건반을 누르는 힘이 일정하지 않거나 타악기의 박자가 조금 늦게 따라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불완전함 속에 꾸미지 않은 즐거움과 손으로 만든 듯한 온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음악에 일부러 여러 가지 텍스처를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Wow & Flutter 효과를 사용해 음의 높이와 타이밍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도록 했습니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서 들을 법한 불규칙한 움직임을 더해 모든 음이 정확한 위치에 놓인 듯한 느낌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Hesitant Dynamics는 음량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고 조금씩 머뭇거리며 움직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건반이나 타악기를 누르는 힘이 매번 다르게 느껴지면서,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연주하는 듯한 인상을 더해주었습니다.
Bitcrush는 지나치게 선명한 디지털 사운드를 조금 거칠게 바꾸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래된 녹음이나 장난감 악기에서 들리는 듯한 로파이 질감을 더하면서, 반듯하게 정돈된 전문 연주의 느낌을 덜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Tape Hiss를 얇게 더했습니다. 완전히 깨끗한 디지털 공간이 아니라,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나 작은 녹음기에 어린 시절의 연주를 담아둔 듯한 따뜻한 배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효과들의 목적은 음악의 품질을 낮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인공적으로 들리는 결과를 덜어내고, 조금은 서툴고 손맛이 남아 있는 동화적인 음악으로 바꾸기 위한 의도적인 불완전함이었습니다. 반듯하게 인쇄된 그림보다 크레용 자국과 손의 움직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림에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습니다.
이 후반 작업은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필요로 했습니다.
효과를 너무 강하게 적용하면 음악이 낡거나 손상된 것처럼 들렸고, 너무 약하게 적용하면 원래의 매끄러운 연주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각각의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흔들림과 거친 질감, 노이즈의 정도를 조절해야 했습니다.
같은 설정도 악기 구성과 음역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어떤 곡에서는 리코더가 자연스럽게 흔들렸지만, 다른 곡에서는 피아노까지 지나치게 불안정해졌습니다. 결국 모든 곡에 똑같은 효과를 적용하기보다 각 곡의 분위기를 들으며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 작업은 이후 또 다른 제작 과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매번 여러 효과를 하나씩 적용하고 결과를 비교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음악의 후반 작업을 조금 더 일관되고 효율적으로 진행할 방법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렇게 Claude와 함께 Music Auto Post Production Tool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Crayon World에서 직접 시도했던 Wow & Flutter, Hesitant Dynamics, Bitcrush, Tape Hiss 등의 조합을 바탕으로, 음악에 원하는 질감을 입히고 여러 결과를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 자동 후반 제작 도구입니다.
처음에는 한 앨범의 독특한 소리를 만들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견한 방법을 반복 가능한 작업 방식으로 정리하면서, Crayon World는 음악 한 장을 완성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후의 제작 도구와 워크플로까지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Music Auto Post Production Tool을 만들게 된 과정과 실제 작업 방식은 Tools & Workflow의 별도 글에서 자세히 소개하려 합니다.
앨범의 곡을 고르는 과정에서도 여러 번의 선택과 수정이 필요했습니다.
같은 악기를 요청해도 어떤 결과는 지나치게 유아용 음악처럼 들렸고, 어떤 곡은 편곡이 크게 부풀어 앨범의 소박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멜로디가 너무 단순하게 반복되거나 한 곡 안에서 이야기가 변화하지 않는 결과도 제외했습니다.
각 결과를 하나씩 들으며 악기의 조합과 멜로디, 곡의 길이와 분위기를 비교했고, Crayon World의 작은 세계 안에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는 곡들만 다시 골랐습니다.
곡의 순서 역시 열두 개의 장면이 한 권의 그림책처럼 펼쳐지도록 구성했습니다.
앨범의 초반에는 새로운 놀이를 발견한 듯 밝고 호기심 어린 음악을 배치했습니다. 중반에는 상상의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면서 낯선 장소를 탐험하는 듯한 움직임을 담았고, 후반으로 갈수록 하루의 놀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차분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는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결과를 생각하게 됩니다.
잘할 수 있을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시간을 들일 만한 일인지 판단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크레용 한 자루만 있어도 망설이지 않고 빈 종이부터 채워나갔습니다.
Crayon World를 만들며 다시 떠올리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완벽하게 그리지 않아도 괜찮고,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즐거울 수 있었던 시간. 익숙한 현실 위에 마음대로 색을 더하고, 작은 소리 하나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던 자유로운 감각입니다.
이 앨범이 어린이를 위한 음악으로만 머물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잠시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른에게도, 오래전에 잊고 있던 장면을 다시 떠올리고 싶은 사람에게도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열두 개의 작은 이야기를 천천히 넘겨보듯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크레용으로 그린 선은 조금 비뚤고 색은 종종 경계를 벗어납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그 안의 마음이 더 솔직하게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Crayon World는 우리가 한때 가지고 있었던 자유로운 상상과 작은 호기심, 그리고 아직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색을 음악으로 다시 꺼내본 앨범입니다.
Crayon World는 Spotify, Apple Music, YouTube Music을 비롯한 주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Crayon World 전체 앨범 듣기
YouTube에서 Rain on Porcelain의 Crayon World 전체 앨범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Rain on Porcelain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